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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길마 아재

5. 에일런(15)

평일 중 가장 기분이 좋아진다는 퇴근시간.

재현은 괜한 의심을 사지 않도록 평소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고용센터에서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나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할 것이 없어진 그는 집과 떨어진 곳을 배회하다가 이제서야 돌아가는 것이다.


보통 일 안하면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시간도 넘처나니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만 그렇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백수 감각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이 모든게 지루하고 허무하다.

특히 한 집안의 가장이라면 책임감이라는 패시브가 따라오기 때문에 차라리 일을 하고 싶어질 정도다.


재현의 경우 이제 백수생활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져야 했기에 이런 상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시간을 보니 7시 30분이다.

그가 일했던 직장은 사무직이 아니다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칼퇴근이 가능했고, 집에 도착하면 대략 7시 30분 많게는 50분이면 도착을 하는 편이어서 지금 가면 딱 맞았다.


  "나왔어."


  "왔어? 와서 밥 먹어."


  "다녀오셨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족들이 나와 반겨주었다.

재현은 늘 그렇듯 옷을 갈아 입고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메뉴는 특별한 것 없고 평소와 다를바 없었다.


  "뭔가 기분 좋은 일 있나보네?"


이연의 평소보다 표정이 밝자 지연이 물었다.

평소에는 저렇지 않은데 얼굴에 티를 내고 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응. 좋은 일이 있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재현은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겠지?


부녀지간이긴 해도 나름 거래를 했는데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심 불안했다.

애는 애인지라 말 잘 못했다간 큰일 난다.


  "무슨 일인데?"


  "오늘 멋진 언니를 만나서 좋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멋진 언니를 만나서 기분이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물론 멋진 사람을 만나면 기분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황 없이 그 말만 하니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게 있어. 히힛1"


그의 부모님들은 그녀가 스페셜리스트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고, 또 알게 되면 캡슐방에서 돈만 쓴다고 혼낼 것이 뻔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시험은 잘 봤어?"


  "응! 잘 봤어."


평소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닌지라 지연은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공부도 알아서 하니 굳이 그녀의 학업에 심하게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이현이 너는?"


자녀가 둘 다 학생이다 보니 시험기간이 비슷했기에 자연스레 장남인 이현에게 불똥이 튀었다.


  "나도 잘 본 것 같아."


이현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딱히 잘 본 것도, 잘 못 본것도 아니어서 그 말 외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해?"


  "응. 확실해."


의심스럽다는 듯 재차 물어보자 이현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괜히 기죽은듯 말하면 잔소리를 할 수 있기때문에 최대한 신뢰를 심어줘야 했다.


  "너 얼마 전에 학교 마치고 캡슐방에서 게임했었잖아. 공부는 했어? 시험 못 친건 아니지?"


이쯤되면 짜증이 나는 수준이었지만 이현은 섣불리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응. 아냐. 나중에 성적표 보면 알거야."


어차피 잘 쳤는지 못 쳤는지는 본인만 알고 있고, 성적표가 나오려면 멀었으니 이런 식으로 대처만 하면 더 이상 잔소리가 들을 일이 없었다.

시험도 잘 쳤고 나중에 성적표 보라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데 어느 부모가 여기서 더 따지겠는가?


다만 성적표 결과에 따라서 그에게 상이나 벌이 내려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다.

굳이 여기서 잔소리를 들을 이유는 전혀 없다.

지연도 아들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더 이상 학업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적이 찾아왔다.

다들 말을 하지 않으니 조용해졌지만 익숙했기에 그냥 식사를 했다.

하지만 재현은 밥을 먹으면서도 이현이 캡슐방에 갔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본인도 게임을 좋아하고 스페셜리스트를 하다보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이현아. 너 무슨 게임하냐?"


평소라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지만 백수가 되다보니 가족들에게 신경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뭔가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에 대해서 알아가려고 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끔 친구들이랑 가서 하는 것 뿐이에요. 자주 하거나 하진 않아요."


  "그래."


이왕 물어본거 좀 더 아들과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저렇게 대답을 해버리니 더 이상 말을 섞을 기회가 없어졌고, 다시 조용한 상태에서 식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이연이 밥그릇을 싱크대에 옮긴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이현과 지연도 식사를 다 하고 각자 할 일을 했다.

혼자 남은 재현은 식사를 마저 끝낸 뒤 거실 TV를 켰다.


저녁 시간대다 보니 대부분 뉴스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정치관련 이야기라 그는 채널을 돌렸다.

뭔가 새로운 사실에 대한거라면 모르겠지만 최근 같은 기사만 내보내고 있어서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게된 것이 게임채널이었다.

다른 채널을 볼 수도 있지만 간만에 스페셜리스트를 하다보니 관심이 생긴것이다.

마침 TV에서도 스페셜리스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게임 채널을 시청했다.


거기에는 남자 출연자가 오늘 스페셜리스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었다.


  - ... 그 상황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뭔가 했는데 알고보니 퍼니쉬먼트라고 하더군요."


  - 퍼니쉬먼트요? 그게 뭐죠?


여자 출연자가 생소한 듯 질문을 하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 그건 스페셜리스트 중 한 명인 은빛 기사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스킬입니다.

개발사에서는 이 스킬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 빛에 닿으면 모두 즉사를 한다는겁니다.


  - 그거 완전 사기 아닌가요?


TV에서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이 나오자 재현이 TV 볼륨을 높였다.

혹여 그가 알고 있는 삐에로 가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네 물론 그것만 보면 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스페셜리스트에는 상위 10위 안에 들어야만 저런 스킬이나 혜택을 받기때문에 어떻게 보면 노력의 결실로 얻은 스킬이니 너무 사기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남들보다 배로 열심히 플레이를 한 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 그렇군요. 그런데 왜 갑자기 거기서 스페셜리스트가 나타난거죠?

보통 그들은 모든 유저들의 공공의 적이라는 이미자가 있어서 가는 길마다 PK를 걸어오는 유저가 많잖아요? 그래서 보통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네. 그래서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 확인 해 봤습니다.

다행이 그 당시 목격자를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요.영상 한 번 보시죠.


남자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전환되며 모자이크 처리 된 유저가 나타났다.


  - 은빛 기사를 봤다고고 하셨는데 어떻게 보게된 겁니까?


  - 저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사냥을 하고 쉬고 있었는데 한 무리가 오크 족장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무리가 스틸을 했습니다.

그래서 두 무리가 싸우게 되었는데 갑자기 은빛 기사가 나타나서 퍼니쉬먼트를 썼어요.


  - 혹시 그가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 아뇨.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멀어서 못 들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주변이 초토화되고 근처에 있던 저희도 위험할 수 있어서 그 자리를 피해서 잘 모르겠네요.


인터뷰는 여기까지였다.

다시 화면이 스튜디오로 바뀌었다.


  - 네. 보신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는데요. 저희는 이 은빛 기사가 자신의 동료 혹은 지인을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 그 이유가 뭔가요?


  - 앞서 영상에 당시 영상을 보여드린 것을 자세히 보면 멀리서 찍어서 잘 안 보일 수도 있는데 여기 한 무리가 포위된 상태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정적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은빛 기사가 나타났죠.

그렇기 때문에 지인이 위험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남자의 설명이 이어지자 당시 화면으로 바뀌었다.

그 곳에는 은빛 갑옷을 걸친 기사가 서 있었다.

이후 방패를 앞세워 방어태세를 갖추자 하늘에서 강력한 빛이 쏟아지면서 주변의 적들을 집어 삼켰다.


  - 그렇군요. 그러면...


  "에이. 그 놈이 아니네."


영상에 그가 아는 삐에로 가면이 나오지 않자 그는 실망하며 채널을 돌렸다.


  "잠깐만 아빠. 다시 채널 좀."


언제 왔는지 그의 뒤에 이연이 서 있었다.

재현은 어차피 더 이상 볼 것도 없기에 다시 채널을 돌렸다.


  "너 스페셜리스트 하냐?"


  "아니. 그냥 요즘 저게 유행한다고 해서 보는거야."


갑작스러운 기습 질문에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거짓말을 했다.

솔직하게 말하는것도 상관 없지만 괜히 비싼 돈 들여가며 캡슐방에 가서 게임을 한다 하면 어떤 부모라도 좋게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행이 재현은 별 의심 없이 리모컨을 그녀에게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휴우. 들킬 뻔 했네."


  "뭐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연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이현이 악마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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